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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포스트탐방] 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서울포스트 2015. 3. 3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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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리뷰] 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5/01/19 20:48:19)

 


[탐방] 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이미지 전송문제로 인한 리뷰 기사

▲ 완벽한 해서체, 완전한 글자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봉선홍경사갈기(奉先弘慶寺碣記)' ⓒ20141214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보호각이 씌워지기 이전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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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홍경사터비갈(奉先弘慶寺터碑碣),
봉선홍경사지비갈(奉先弘慶寺事址碑碣) 등.

'홍경사지(弘慶寺事址 홍경사터)'로도 불리는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에 있는 절터에는 '봉선홍경사갈(奉先弘慶寺事碣)'이 국보 제7호로 남아 있다. 이 비석을 일컫는 이름은 전기한 것처럼 수 가지다.

보통 귀부라고 해 거북의 머리를 형상했지만 용의 머리 모양과도 흡사하고 때에 따라서는 거북과 용의 형상을 합쳐 괴수(怪獸)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현대에 가장 흔히 볼 수 이는 해태상이 그 예라고 하겠다. 이곳의 귀부는 형상은 더 특이하다. 코구멍을 벌름거리며 목을 옆으로 획 튼 모양이 그것이며, 바로 여기서 익살스럽게 두리번거리며 전진하는 거북의 역동성이 느껴진다.

해서체 로 새겨진 봉선홍경사갈 비문은 문화재에서 볼 수 있는 서체 중 가장 완벽,완전한 글자 모양으로, 지금으로 치면 예서 와 해서 중간체로 볼 수 있다. 글자의 멋과 아름다움의 극치미에 감탄하노라!

귀부는 삼국시대에는 거북 머리 모양이 뚜렷하고 고려 때부터는 용머리 형상이 주류를 이룬다. 홍경사터 귀부는 북한산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귀부와 마찬가지로 서구풍 이구아나 형상으로도 보인다.

우리나라 문화재 분류는 일제대 전부 국보였으나 1960년대 국보와 보물로 나눴고 사적이 분류되었다. 국보는 1호부터 국가의 상징과 정체성, 년대, 의의, 명료성 등으로 가치를 매겼다. 따라서 국보1호부터 10호까지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연히 정체성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문제는 방화로 전소되었다가 복원된 남대문 과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라는 것.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은 문화재청이 특별히 지위를 유지할 이유를 밝혔으나, 국보 제3호인 '북한산비'는 그 실체가 가장 모호하다.

이 북한산비 는 아무것도 없거나 독해 불가능한 비면에 김정희가 추사체로 '진흥왕이 순수했다'고 새겨 넣었다. 김정희는 완당집에서 황초령비나 마운령비 등을 참고 해 심정 했다고 밝혔다. 즉, 당시 초벌 탁본도 존재하지 않는 비문을 있는 그대로 판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정황상 진흥왕 관련 비 임을 개인적으로 확신하고 자신이 내용을 새겼다는 것. 그리고 청나라에 먼저 알려, 청국의 (검증된) 관보형태로 조선에 이 사실이 전파된다. 어째, 역사 대사기극 냄새가 진하게 난다.

우리 문화재를 우리조차 제대로 못보도록 둘러 씌워 놓은 보호각에 갑갑함도 느꼈으나, 예기치 않은 봉선홍경사지 에서 국보 7호와 모방하고 싶은 서체를 만났으니 오늘 수입은 두둑하다. 눈이 제법 쌓인 천안의 산야와 들판을 감상하며... (龍)




▲ 완벽한 해서체, 완전한 글자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봉선홍경사갈기(奉先弘慶寺碣記)' ⓒ20141214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무슨 글씨 흔적이 있는 비신 ⓒ서울포스트

※ 아래는 전부 참고로 사용한 자료

1. 봉선홍경사 비갈(奉先弘慶寺碑碣)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成歡邑) 대홍리(大弘里)의 봉선홍경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석 석비. 국보 제7호.
크기는 전체 높이 2.8m, 비신높이 1.94m·너비 1m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전체높이 2.8m, 비신높이 l.94m, 너비 lm이다. 1021년(현종 12)에 창건한 봉선홍경사 경내에 세운 사적비로, 현존하는 석비 중 가장 완미(完美)한 형태이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어 비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귀부는 대부분 매몰되어 하부의 상태를 알 수 없으나 괴수(怪獸)의 형상을 한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며, 조각수법 또한 소박하다. 귀갑(龜甲) 중앙에 마련한 비좌(碑座)는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과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을 붙여 만들었고, 이수는 높은 산 모양으로 도식화된 운룡(雲龍)무늬가 조각되었다.

비신에는 앞면에 테두리를 돌리고, 테두리 안에는 비문을 각자(刻字)하였으며, 외주(外周)에는 당초무늬띠를, 좌우측면에는 보상화(寶相華)무늬를 조각하였고, 상단에 '奉先弘慶寺碣記'라고 횡서하였다. 비문은 자경(字徑) 2.4cm의 해서(楷書)로서, 당시의 석유(碩儒)로 이름이 높았던 최충(崔冲 )이 찬(撰)하고 백현례(白玄禮)가 쓴 것이다. 연대는 비문 끝에 '聖上御囿之十八載大平紀曆之第六年夏四月 日謹記'라고 쓰여 있어 이 절을 창건한 5년 후인 1026년에 세운 사적비임을 알 수 있다.

2.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홍경원(弘慶院)이라고도 함

1021년(현종 12)에 형긍(迥兢)이 왕의 명을 받아 여행자의 보호 및 편의를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수행을 위한 장소로 보다는 원(院)의 성격이 많았던 사찰이다. 이 절이 세워진 성환역 부근은 교통의 요충지였지만, 인가가 멀고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 강도가 자주 출몰하여 행인이 불편을 겪던 지역이었으므로, 현종이 형긍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한 것이다. 창건 당시 득총(得聰)·장림(藏琳) 등이 형긍을 도왔으며, 현종은 강민첨(姜民瞻)·김맹(金猛) 등을 별감사로 삼아 함께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1016년부터 1021년까지 200여 칸의 건물을 세우고 봉선홍경사라고 사액(賜額)하였으며, 절 서쪽에 객관(客館) 80칸을 세워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숙소와 양식과 말 먹이 등을 마련하여 행인들에게 제공하였다.

1130년(인종 8) 8월 묘청(妙淸)의 말을 따라 이 절에서 아타파구신도량(阿吒波拘神道場)을 27일 동안 개최하였다. 이 도량은 아타파구위 대장군, 즉 광신귀신 대장(曠神鬼神大將)이 말한 다라니를 외워 재난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법회로서 강종 때에도 이 절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도량문(道場文)이 전해지고 있다.

1177년(명종 7) 3월에는 망이(亡伊) 등이 이 절을 불태우고 승려 10인을 죽였으며, 주지승이 핍박을 받는 등의 변이 있었다. 1383년(우왕 9) 한수(韓脩)가 이 절에서 축원하였다. 조선 초기에 절은 폐허가 되고 원만이 남았으므로, 절 이름을 따라 홍경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1026년에 최충(崔冲)이 지었던 봉선홍경사기를 새긴 비갈(碑碣:비석)만이 남아 국보 제7호로 보호되고 있다.

3. 봉선 홍경사터 비갈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성환읍 못미처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숲이 있고 그 사이에 비각이 하나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험상궂게 생긴 거북 한 마리가 등에 비석을 짊어진 채 고개를 외로 틀고 노려보고 있다. 이것이 봉선 홍경사터 비갈(奉先 弘慶寺-碑碣)이다.

당대의 대학자 최충(崔沖, 984~1068)이 짓고 고려조 해서체의 제일인자인 백현례가 쓴 비문에 새겨 있기를 봉선 홍경사는 고려 초 8대 현종(992~1031) 때에 세운 대찰이다. 한데 수도인 개경 근방도 아니고, 선종 사찰로서의 심산오지도 아닌, 역원이나 있어야 할 길목에 절집이 있는 것이 이상스럽다. 비신에 적혀 있는바, 그 내력은 이러하다.

당시 성환 일대는 삼남에서 한양이나 개경에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게 되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갈대가 무성하여 도적이 들끓었으니 행인들이 이곳을 지나기를 심히 두려워하였다. 현종의 아버지는 본래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로 뒤에 안종으로 추대된 사람인데, 평소에 불법을 숭앙하고 법화경을 받들며 절을 이루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현종이 왕위에 올라 생부의 유지를 받들어 이곳에 절을 지을 뜻으로 현종 7년에 착공하여 5년 만인 12년에 200여 칸의 큰 절을 완공하였다. 절 이름을 봉선 홍경사라고 하였는데 ‘봉선’이란 ‘선친의 유지를 받든다’는 뜻이다. 아울러 절 서쪽에 80칸짜리 광련통화원(廣緣通化院)이란 큰 객관을 지어 행인들이 두루 편리하도록 했다.

봉선 홍경사터 : 현재 봉선 홍경사 비갈은 절터 한쪽의 좁은 비각 안에 갇혀 있다.

이에 따라 봉선 홍경사는 고려 제8대 임금인 현종 12년(102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천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의연히 지키고 있는 사적비도 그 5년 뒤인 1026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의 학자 이규보가 편찬한 『동문선』에서는 이 봉선 홍경사가 설립되었을 무렵에 관해 “200여 칸의 당우에 여러 공덕상을 그리고 봉선 홍경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마치 도솔천과 같이 신비롭고, 종과 탑이 있었다.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어 등이 1,000개나 이어져 켜져 있었다”고 적었으니 당대로서는 어마어마한 절이었던 모양이다.

비갈이 있는 전각 주변에는 당시 절집의 탑이었을 석재들이 깨어져 흩어져 있어 옛 모습이 간 데 없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봉선 홍경사터 비갈 탁본 부분 : 비신에 새긴 글은 당대의 유학자 최충이 지었으며 글씨는 백현례가 썼다. 글씨의 크기 하나하나가 3㎝의 해서로 짜임새가 엄정하다.

이 비가 특이한 것은 먼저 ‘비갈’1)이라는 이름에서이다. ‘비’란 뒷장에 따로 쓴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돌이나 나무 따위에 글을 새겨 역사적 사실을 남기는 것을 통틀어 말한다. 그런데 비신이 네모지지 않고 끝이 둥근 것을 ‘갈’이라 하여 형식으로 구분하였으나 후대에는 구분 없이 붙였다. 이 비는 끝이 둥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갈’이라는 말이 굳이 붙을 까닭이 없는데도 붙어 있다.

또 하나는 비신을 받친 거북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90도 돌아가 있는 점이다. 그리하여 다른 형식적인 거북들과는 달리 한눈에도 매우 활기차 보이며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머리모양도 물고기 같은 지느러미를 달아 용머리 모양으로 한껏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가 하면 거북 등 위에 한편으로는 거북을 덮고 한편으로는 비신을 받친 우아한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비신의 옆면에도 섬세한 당초문이 조각되어 용두의 우악스러움을 보완한다. 비신 위의 이수에는 귀부에 견주어서는 다소 도식적인 운룡문이 조각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모자를 쓴 듯한 산형(山形)을 이루고 있다. 전체 높이 2.8m의 장대한 이 비는 형태적인 완결성으로 말미암아 사적비로서는 대표될 만하여 국보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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