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인왕산을 배경한 경희궁지,경희궁공원,서울역사박물관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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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궁 터. 흥화문에서 뜰을 지나면 정전앞에 개천(금천)이 가로 흐르며 정전 인 숭정전 이 인왕산 정상과 정치(正致) 한다. ⓒ2014061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한가해서 고궁나들이에 나선 것이 아니다. 국가 시스템이 약자와 '을'로서의 서민이 설 곳이 없다. 독백하듯 관료라는 사람 앞에서 '여기도 개판이군'이라고 말했다. 곳곳 엉망임을 확인하고 망연자실 걸었던 곳이 가까운 경희궁지.
조선 5대 궁은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壽宮) ,경희궁(慶熙宮) 으로 각각의 대문은 광화문(廣化門), 돈화문(敦化門), 홍화문(弘化門), 대한문(大韓門), 흥화문(興化門) 이다. 이 중 덕수궁의 대한문은 본래 대안문(大安門)이었던 것을 고종 때 대한제국을 표방하여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창덕궁 정문인 홍화문은 현재 복원된 혜화문 터에 있었으며, 흥화문은 경희궁지 가 현 서울역사박물관까지였던지라 복원하면서 신문로 금천교에서 여러 경로를 거쳐 수 십 미터 옮겨졌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궁(離宮). 5대궁궐 중 경희궁만이 거의 멸실돼 복원중인 관계로, 남아있는 궁이 아니라 '경희궁터(경희궁지)'로 기록돼고 있다. 다른 궁이 관람을 제한한다면 이곳은 완전 개방돼 입장료도 무료.
경희궁지 는 인왕산 기슭에 있어 조선 다른 궁이 가진 연못이 없는 대신 대문 앞에 금천(錦川)이 흘렀다. 때문에 복원이 원활하여 세월이 흐른 후 '궁'으로 지위를 얻는다면 조선 궁궐 중 가장 시원시원한 짜임새를 한 눈에 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동남쪽이 툭 터져 전망이나 지기가 좋은 터로 보인다.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공원, 서울역사박물관이 함게 묶여있어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곳. (=기자 주) 경희궁 은 정전 이 인왕산 정상과, 또 창덕궁 은 정문 인 돈화문 이 북한산 보현봉 정상 과 정치(正致)한다. 아래 사진은 종로에서 돈화문정문을 향해가면서 보인 모양인데, 보물 제383호인 돈화문과 사적 제122호인 창덕궁을 관람하거나 답사할 때 돈화문과 보현봉이 일치한 모습을 뺀다면 수박 겉핥기 역사지리탐방이다. 즉 외양이 껍질 같지만 여기서만큼은 중요한 지리적 알맹이를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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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에서 돈화문정문을 향해가면서 보인 모양인데 창덕궁 은 정문 인 돈화문 이 북한산 보현봉 정상 과 정치한다. ⓒ서울포스트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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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까지 '대안문(大安門)'은 고종때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었다. ⓒ자료 |
▒ 경희궁 [慶熙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경희궁지 로 사적 제271호.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5대궁 중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다. 정원군(定遠君:元宗)의 집 근처인 색문동(塞門洞)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부사(府使) 신경희(申景禧)의 말에 따라 이곳의 왕기를 제압하기 위해 1617년(광해군 9)에 수백 호의 여염집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경덕궁(慶德宮)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뒤인 1620년 완공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 해 서궐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해 동궐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인조반정(1623)으로 등극한 인조는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으며, 그뒤 효종부터 철종에 이르는 10여 명의 임금이 살았다. 현종과 숙종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 화재와 수리가 특히 많았다. 숙종은 이 궁의 정전(政殿)인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융복전(隆福殿)에서 죽었다. 경종은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함으로써 경덕궁에서 최초로 즉위식을 올렸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바꾸었다. 영조는 이곳에서 즉위를 했으나 몇 달만 이곳에서 지냈으므로 거의 빈 궁궐로 있었다. 1810년(순조 10) 순조가 이곳으로 옮겨 지냈는데, 1829년(순조 29)에 많은 건물이 불타 2년 뒤에 중건했고, 1834년 회상전에서 죽었다. 헌종도 이곳에서 즉위했으나 여섯 달만 머물렀으며 그뒤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60년(철종 11) 수리를 하고 철종이 일곱 달만 머물고 창덕궁으로 옮김으로써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빈 궁궐이었다. 1889년(고종 26) 숭정문이 불탔으나 1902년(광무 6)에 수리했다.
정조 때 만들어진 〈경희궁지 慶熙宮志〉에 경희궁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궁성의 둘레는 총길이 1,100보(步)로 6,600자였으며 사방에 5개의 문을 두었다. 동쪽에 정문인 흥화문(興化門)과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남문 개양문(開陽門), 서문 숭의문(崇義門), 북문 무덕문(武德門)이다. 정전인 숭정전은 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곳으로 궁성의 서쪽에 위치했으며, 주위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다. 뒤쪽에는 업무를 보던 자정전(資政殿)이 있었는데 이곳도 행각으로 둘러졌다.
숭정전의 동쪽에는 정침(正寢)인 융복전이, 바로 서쪽에는 왕후의 침전인 회상전이 있었다. 회상전의 담은 5개의 문으로 둘러졌었고, 주위에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또 융복전 동쪽에는 임금의 어머니인 대비가 생활하던 곳인 장락전(長樂殿)이 있었다. 이들 침전 뒤쪽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는 후원이 자리했다. 1908년(융희 2)부터 일제에 의해 궁궐의 서쪽에 일본인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한 정지작업이 시작되면서 조선왕조의 5대 궁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25년 전매국관사(專賣局官舍)로 궁궐의 동쪽이 분할되었고, 1926년부터 주요건물의 이전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숭정전은 1926년 당시 태고사(太古寺, 현 조계사 曹溪寺) 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다. 1928년 흥정당(興政堂)은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했고, 황학정(黃鶴亭)은 사직단(社稷壇) 뒤로, 흥화문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함으로써 결국 빈터만 남게 되어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1974년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1988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2002년 현재 자정전과 숭정전, 숭정문 등을 복원하는 1차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朴彦坤 글 등 참고)
※ 서울역사박물관
▲ 돈화문(敦化門)
창덕궁(昌德宮)의 정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로, 1412(태종 12)년에 태종이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이궁(移宮)하면서 창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광해군 1)년에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함께 중건되었다. 보물 제383호. ⓒ서울포스트
▲ 흥화문(興化門)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세운 경희궁의 정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원래는 현재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이 1932년 흥화문을 1932년 남산 자락에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할 때 정문으로 사용. 해방후 박문사는 폐사되고 흥화문은 영빈관(迎賓館) 및 신라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移轉) 복원하였다. 그러나 원 자리는 동향을 보고 배치했다고 하나, 그 위치는 현재 찾기 힘들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의 다포 양식 건물로, 정전인 숭정전, 황학정과 더불어 건축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서울포스트
▲ 숭정전(崇政殿)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 창건 공사 초기인 1618년경에 세워졌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 특히 경종·정조·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 건물을 현 조계사(당시는 태고종의 태고사 임)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남아있다. 현 위치 숭정전은 복원된 것 ⓒ서울포스트
▲ 태령전(泰寧殿) 은 영조 재위시 자신의 어진을 둔 곳. 현판체는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했다고 한다. ⓒ서울포스트
▲ 자정전(資政殿)은 경희궁의 편전으로 1617~20년(광해군 9~12)에 건립.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 ⓒ서울포스트
▲ 서암(瑞巖)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암천으로 불리는 바위 속에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왕암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울포스트
▲ 금천교(錦川橋)
금천교는 경희궁 흥화문과 경희궁 내 여러 전각 사이에 흐르던 금천(禁川)에 놓인 돌다리 ⓒ서울포스트
▲ 경희궁 터. 흥화문에서 뜰을 지나면 정전앞에 개천(금천)이 가로 흐르며 정전 인 숭정전 이 인왕산 정상과 정치(正致) 한다. ⓒ20140619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종로에서 돈화문정문을 향해가면서 보인 모양인데 창덕궁 은 정문 인 돈화문 이 북한산 보현봉 정상 과 정치한다. ⓒ서울포스트자료
▲ 20세기 초까지 '대안문(大安門)'은 고종때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었다. ⓒ자료
▲ 일본의 경성중학교가 있던 터에 서울중학교,서울고등학교(서울중고등학교)가 들어섰던 곳. ⓒ서울포스트
▲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 수령 350년의 느티나무 ⓒ서울포스트
▲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 이희(李喜 1845-1912, 처음 이름은 재면, 고종의 형)의 신도비 ⓒ서울포스트
▲ 흥선대원군의 증손자 이우(李鍝 1912-1945) 의 묘비 로 아무 글씨가 없는 백비(白碑). 1945년 일본 장교로 히로시마 현지에 파견중 원폭으로 희생 ⓒ서울포스트
▲ 미완성 비석. 2013년 8월 마포구 현석동 108번지 신석초등학교 부근 주택공사현장에서 발굴. 폭 114cm,두께 46cm,높이 360cm로 조선(17세기)시대. 출토 당시 표면이 거칠고 비문이 없는 비신으로, 이수부분이 화려한 조각은 상당히 지위가 높은 신도비 로 추정. 미완성 비석이나 자료적 가치가 있어 2013년 12월 받침대를 제작하여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하게 되었다. ⓒ서울포스트
▲ 한때 중앙청으로 사용했던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 ⓒ서울포스트
▲ 복원 이전 광화문의 콘크리트 건물 잔해 ⓒ서울포스트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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